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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개봉한 영화 <파과>는 은퇴를 앞둔 60대 여성 킬러 ‘조각’과 그녀를 제거하러 온 젊은 킬러 ‘두유’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결을 다룬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이 아닙니다. 조각의 과거와 현재, 감정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회복, 두유의 분노 속 감정의 파열과 재정의,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는 주인공 캐릭터 분석, 인간 감정의 해체와 복원, 여성 킬러 장르의 새로운 전개, 액션의 감정적 기능 등을 중심으로, 영화 <파과>를 장르 이상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조각: 감정을 제거한 채 살아온 인간 무기의 말로
조각(이혜영)은 영화 속에서 '대모님'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여성 킬러입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살인이라는 행위를 감정 없이 반복하며 스스로를 하나의 ‘무기’로 단련시켜 왔습니다. 조각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정확성’이고, 그 정확성은 곧 생존이자 존재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초반 강인한 이미지를 조금씩 부숩니다. 무릎을 잡고 앉아 약을 바르는 장면, 늙은 개를 안고 병원을 찾는 모습, 그리고 수의사 ‘강 선생’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 순간들 속에는 '조각'이 아닌 ‘조영선’이라는 한 인간이 조금씩 복원되고 있습니다.
조각은 킬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되찾으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 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은 ‘죽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상태로 죽는 것’ 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인물은 극도로 복합적이며 인간적인 결을 품고 있습니다.
두유: 복수로 태어난 분노의 신입 킬러
반면, 두유(김성철)는 조각과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젊고 민첩하며, 치명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 그 밑바닥에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특히 ‘분노’가 흐릅니다.
그는 조각이 과거에 자신과 얽힌 특정 사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조각을 쫓고 있습니다. 단순한 ‘신입 대 선배’의 구도가 아닌, 이 영화는 두유를 조각의 ‘감정적 거울’로 배치합니다.
두유는 감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노하며 공격하고, 복수심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며, 조각과의 대립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혼란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조각이 아닌, 자신 안의 감정을 직면함으로써 인간성을 다시 정의하려 하며, 조각과의 마지막 대결은 누가 더 강한가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감정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대로 변화합니다.
킬러 영화가 아닌, 감정의 서스펜스
<파과>는 전통적인 액션 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 중심을 ‘감정’이라는 비물리적 긴장 요소로 채워넣습니다. 일반적인 킬러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총격전, 맨몸 격투, 전략 싸움이 모두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이 훨씬 더 큰 갈등을 유발합니다.
조각은 무기를 들고 싸우지만, 동시에 '자신이 무기가 아닌 존재로 살아갈 수 있나'를 고민합니다. 두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략을 세우지만, 조각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 앞에서 분노 대신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긴장감 있는 대치와 동시에 두 사람의 눈빛, 호흡, 주저함을 통해 감정이 폭발하는 구조로 진행됩니다. 이는 관객에게도 "진짜 강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단순한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몰입을 선사합니다.
여성 킬러 장르의 확장: 조각이 만든 새로운 서사
<파과>는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노년 여성 킬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는 기존 액션 장르, 특히 남성 중심의 킬러 서사를 전복하고 확장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조각은 ‘여성’이기 때문에 약한 것도, ‘노년’이기 때문에 느린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 두 속성으로 인해 더 오래 살아남았고, 더 많이 무뎌졌고, 더 많이 깨달았습니다.
이혜영 배우는 조각이라는 인물을 통해 ‘강함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합니다. 이는 기존의 물리적 액션 대신, 감정적 강인함, 관계의 책임, 회복에의 용기를 ‘액션’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여성 중심 서사의 다양성을 넓히고, 동시에 관객에게 “나이 들고 감정 많은 인간도 충분히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전달합니다.
결론: 감정이 없는 세계에서 다시 감정을 회복하는 이야기
<파과>는 킬러 장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본질은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각은 삶을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잊었고, 두유는 복수를 위해 감정을 악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도달하는 곳은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자리입니다.
조각은 살아온 세월을 부정하지 않되, 그 안에서 놓친 것들에 눈을 뜨고, 두유는 분노의 무게가 자신을 얼마나 잠식해왔는지를 깨닫습니다.
이 영화는 말합니다. “살아남는 것보다,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위대하다.”
그리고 그 말을 가장 강렬하게 증명하는 것은, 누구보다 조용한 얼굴로 총을 드는 한 노년 여성의 눈빛입니다.